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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링선수 출신 - 플라톤

산수호학(山叟好學) 2009. 2. 3. 19:03


레슬링선수 출신 - 플라톤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footnote(각주)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이 말은 플라톤 하나만 이해하면 서양철학사는 끝내준다는 말인데, 그만큼 서양철학사는 플라톤의 결정적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김용옥, 철학강의, 통나무, 1986. p. 261).

플라톤(Platon, B.C 427∼B.C 347)은 기원전 427년에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서 탄생하였다. 그의 부친인 아리스톤(Ariston)은 아테네의 마지막 왕이었던 코드로스(Codrus)의 후손이었으며, 그의 모친인 페릭티오네(Perictione)는 유명한 입벅가이며, 아테네 민주주의의 창시자인 솔론(Solon)의 후손이었다. 

젊었을 때 플라톤은 유명한 선생에게서 음악과 언어를 배웠다. 특히 그는 운동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가 20세 때 소크라테스(Socrates)의 문하에 들어가 스승이 서거할 때까지 8년간 가르침을 열심히 배웠다. 

그 후 플라통느 이집트, 이탈리아, 시실리 등지를 여행하면서 유명한 학자들에게 철학, 수학 등을 배웠다. 그의 나이 약 40세경에 아테네로 돌아와서 아카데메이아(Akademeia)라는 학원을 설립하여 80세 독신으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학생들에게 철학과 수학을 가르쳤다. 

플라톤의 원래 이름은 아리스토클레스(Aristokles)였다.

아테네의 교육제도에 의해서 그가 청소년 시절(16∼17세)때 고입 체육관에서 신체적 단련을 위한 교육을 받던 중 레슬링 교사가 그의 체격이 훌륭함을 칭찬하고 보통 사람보다 어깨 넓이와 턱이 넓다는 뜻의 그리스말인 `Plato`로 애칭하여 부른 것이 그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Platon은 Plato에 대한 영어식 표기이다.

청년 플라톤은 그리스 4대제전경기 중의 하나인 이스트미아(Isthmia) 경기대회에 레슬링선수로 출전하여 2번의 우승 기록을 세웠다. 

그는 제전경기의 우승자로서 혹은 운동선수로서 만족하지 않고 20세 이전까지 갈고 닦은 체육, 덕육이라는 큰 그릇 속에 20세 이후 철학이라는 지육을 담아 또 다른 삶을 살았다. 플라톤은 운동선수로서의 경험과 철학자와 수학자로서의 경험을 살려 체육과 음악의 상호보완적인 교육을 강조하였으며, 탁월한 체육관과 교육관을 피력하였다. 플라톤은 체육을 덕육을 완성하는 수단으로 생각했으며, 체육은 신체를 단련시키고, 음악은 영혼과 심성을 정화한다고 하였다. 

나는 대학 3학년 때 플라톤의 〈국가편〉을 읽고 나서 체육과 음악에 관한 플라톤의 사상에 흠뼉 빠진 나머지 학부 졸업제출논문으로 “플라톤의 국가편에 나타난 체육교육과 음악교육에 대한 연구”라는 논제로 발표한 적이 있었는 데 감회가 새롭다.
나중에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 또한 플라톤 이래로 교육에서 음악과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육은 종교적이고 지적일 뿐만 아니라 감정과 신체발달 전부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음악과 체육을 강조한 루터는 음악은 훌륭하고 숙련된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방탕, 방종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체육훈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리스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인간` 혹은 `학자 겸 운동가(scholar & athlete)`였다. 플라톤은 바로 이상적 인간상의 표본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심포지온(향연), 파이드로스, 국가, 크리톤, 메논, 고리기아스, 법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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