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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행복론 본문

산수호학

쇼펜하우어의 행복론

산수호학(山叟好學) 2013. 8. 4. 09:38

 

 

 

 

1. 쇼펜하우어의 생애

 

착하고 영리한 동물인 하얀 색 푸들 개와 그동안 모은 책이 유일한 벗이고, 자신에게 아내와 아이가 없는 운명에 대해 감사하다는 편지를 어릴 적 친구에게 남긴 쇼펜하우어에게   플라톤과 칸트는 평생토록 그를 인도한 두 별이었고, '절대정신'을 주창한 헤겔(G,W,F, Hegel)을 비판한 세 명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나머지 두 사람은 키에로케고르와 포이어바흐).

쇼펜하우는 1803-1804년까지 2년간 유럽 여행을 통해 문화, 자연, 사회, 고통, 죽음 등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17살이 될 때까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부처가 자신의 유년시절에 질병, 노쇠, 고통, 죽음을 목격한 것처럼 삶의 고통을 보고 강한 충격을 받았다). 1805년에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상인 수업을 중단하고 1809년에 자연과학 공부를 시작으로, 1810년부터는 주로 괴팅겐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811년 철학 공부를 단념하라고 충고한 시인 비란트에게 쇼펜하우어는 " 삶은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삶을 성찰하며 살기로 작정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이 때부터 그는 "삶은 고통이다."란 명제와 씨름하며 외롭게 투쟁하면서 살게된다.

1818년에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라는 책을 800권 인쇄하였지만, 팔리지 않아 폐지로 버려지는 쓰라린 아픔과 치욕을 겪었으나 나중에 이 책의 부록 격인 <부록과 보유>의 성공으로 사람들은 거꾸로 쇼펜하우어의 대표작을 읽게 됨으로써 하나의 사상으로 인정받게 된다. <부록과 보유>는 우리나라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란 이름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다.

1833년부터 죽을 때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외롭게 살았던 쇼펜하우어는 20세기 비합리주의적인 생철학 사상의 기반이 된다.

 

2.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인생관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합리적 비관주의라고 스스로 부른다. 그리고 그는 의지로서의 세계를 매우 어둡게 보고 있다. 따라서 인생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삶의 비참성과 연민이다.

 칸트의 세계가 관념에 머물렀다면, 쇼펜하우어의 세계는 의지와 표상(관념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의 세계였다. 그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말은 세계가 의지적인 부분과 표상적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는 의지인 동시에 표상이라는 뜻이다. 세계는 본체인 동시에 현상이므로 의지로 볼 수도 있고 표상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의 의지는 인간의 결심이나 각오를 나타내는 상식적인 의미의 의지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의지는 목표와 방향도 없고 의식적인 것도 아니며 심지어 인격과도 무관하다.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순수하고 맹목적인 힘, 에너지, 충동과 욕망, 비합리적인 것, 결핍을 채우려는 끊임없는 분투, 본체의 세계, 예지계, 도덕과 상관없는 그저 세계를 표상하는 힘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란 사람이건 무생물이건 자기가 아닌 것, 또는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채우려는 끊임없는 자기움직임, 분투의노력(애쓰는 힘)이라고 말한다.

 

합리적인 인간 지성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인 것(의지)에 의해서 제한되고 좌우된다. 이성의 영향력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의지야말로 모든 고통의 근원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주장한다. 세계에는 고통과 행복이 공존하지만 행복은 잠시 뿐이고 대부분은 고통이다. 어쩌면 행복은 고통을 잠깐 잊게 해주는 것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 세계란 결핍을 채우려는 끝없는 애씀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 애씀의 과정으로서 인생 또한 그 자체가 고통인 것이다. "인생은 고통이다." 이 세상에는 비참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엄청난 비참함이.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고통, 고해라고 부정적인 진단을 내렸지만 인생 자체를 절망하지는 않은 철학자였다. 그는 의지의 본질이 결핍을 채우려는 힘이고 삶 자체가 총체이므로 삶 자체는 원천적으로 절망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쇼편하우어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긴 해도, 일단 태어났다면 생의 의지로써 이 괴로운 세상에 치열하게 저항하며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인생을 처절하게 살아갈 각오를 했다면 , 나에게 엄습해 오는 고통을 이겨 내는 무기는 플라톤적 영원에 대한 명상을 통해 고통 자체를 일상인듯 여기면서 그것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나를 에워싼 질척이는 고통과 실의와 염증 그 압력에 미소로써 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가져다주는 근원적 우울성을 초월하여 스스로 명랑함을 회복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이처럼 정신의 힘으로 생의 불행에 대한 처절한 저항을 통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의 요체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인생은 드러나는 현상의 측면에서는 염세적일 수 있어도 삶의 과정 자체는 물러설 곳이 없는, 그리고 물러설 수도 없는 하나의 치열한 분투의 과정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비록 세계는 원천적으로 우리 앞에 비극적인 모습으로 펼쳐져 있어도 그 '의지의 애씀'이 생명체로서 자기 보존에 있는 한, 그 애씀은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수동적인 순응을 넘어서 적극적인 탈출구를 발견해 낸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애씀이라는 고통스런 삶의 과정을 이겨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하나는 살아가면서 영원성에 대한 관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힌두교, 불교)와 관련되는 것으로 불가식으로 표현하면 해탈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예술이다. 쇼펜하우어가 추천하는 예술은 바흐처럼 수학적 형식미가 뚜렷한 음악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이 누구나 불성을 갖고 있어 스스로의 의지로 견성성불할 수 있듯이, 인간 모두가 똑같이 내부에 본질적인 생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동질감은 인간뿐만 아니라 무생물, 생물, 우주 끝까지 이어지는 동정심(연민)으로 확장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 동정심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도덕실천의 극치라고 생각하였다. 쇼편하우어는 죽기 전 많은 재산을 프로이센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유가족에게 기부하였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에서 토대가 되는 것은 연민이다. 이것은 일상의 삶에서 이기주의의 '반도덕적인 잠재력'에 제동을 거는 힘이 된다. 이기심에서 악이 나오고 공감에서 선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 쇼펜하우어 윤리학의 기본원칙이다. 연민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와는 구별된다. 연민은 타자의 관심사와 곤경을 직접 나의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인데,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세우고 싶다. 접촉하는 사람을 가치와 존엄에 따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하지 말라. 다시 말해 그 사람이 의지가 나쁘다거나 이해력이 제한되어 있다든지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러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미움이나 경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대신 그의 고통, 궁핍, 두려움, 아픔만을 주목하라. 이렇게 할 때 그와 친근감을 느끼고, 공감하며, 미움이나 경멸 대신 연민을 느낀다. 바로 이러한 연민이 복음서가 말하는 아가페(사랑)이다. 인간에 대한 미움과 경멸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이 '존엄'에 대한 탐색보다 오히려 연민이라는 관점이 진정으로 적합한 것이다."

 

전 세계를 포괄할 수 있는 연민은 고통을 무한히 확대하는 이기적인 의지를 부정한다. 연민을 가지게 되면, 자신의 현존에 대한 염려 대신에 모든 생명체에 대한 염려가 생긴다.  (자살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명에의 의지를 완전히 부정하는 체념을 통해서야 비로소 의지와 함께 모든 고통도 긍극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체념하는 자는 변화해 세계를 최대한 무관심 속에 내버려 둔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인식만 남고, 의지는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상대적인 무'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열반)이다.

 

3. 쇼펜하우어의 행복론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고통과 행복이 공존하지만 행복은 잠시뿐이고 대부분은 고통이다.'인 것으로 인지하고, 쾌락이란 소극적인 상태일 뿐이라면서 "만족은 쉽게 얻을 수도 없고 오래 가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세상을 밝게 보지 않은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연관시켜 그의 행복론은 절망적인 행복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 때문에 늘 고통을 받지만, 세상 만물 중에 오직 인간만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간만이 자신이 의지에 따라 무작정 따라가지 않고, 스스로 그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결심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충동과 욕구를 거스르는 철저한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 그때에만 바다와 같이 고요한 영혼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는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더 많은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면 인간은 점점 더 행복해지리라 믿었던 과학 기술적 세계관에 대한 최초의 반성이라고 볼 수 있다.

 

행복이란 어떤 적극적인 쾌락의 성취라기보다는 삶의 비참성에 대한 내적 통찰, 그 불쌍함에 대한 응시,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인간 서로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쇼편하우어는 행복에 대한 그러한 접근 방식을 취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불쌍함, 고통의 일상성에 대한 응시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사회적 이념 이전에 인간 삶의 비참성에 대한 근원적 인식에서 비롯된 그야말로 인류애적 동질감의 발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동질감 속에는 자타의 구분도 없고 그에 따라 시기나 질투, 노여움 따위도 없다. 그러므로 이 고난의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한 동질감을 갖는 것이야말로 종국적으로 자신은 물론 우리 모두 고통스런 삶을 벗어나 평안함에 이르는 참 지혜인 것이다.

 

 

 

*** 참고문헌

1) 이정호 엮음, 행복에 이르는 지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13. pp.127-141.

2) 폴커 슈피어링(정대성 옮김), 세계사를 바꾼 철학의 구라들, 이룸, 2007, pp.319-328.

3) 남경태,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철학, 들녘, 2007, pp.357-363.

4) 안광복,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 웅진지식하우스, 2008, pp.254-264.

5) 빌헬름 바이셰델(안인희 옮김), 철학의 에스프레스, 아이콘 C, 2004, pp.361-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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