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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의 행복론 본문

산수호학

에피쿠로스의 행복론

산수호학(山叟好學) 2013. 8. 1. 19:13

 

 

1. 에피쿠로스의 생애

 

 에피쿠로스의 선조들은 아테네인이었지만 토지를 잃어 그리스의 식민지 사모스에 가서 살았고, 에피쿠로스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사모스에서 외지인 추방 바람이 일어나 어린시절 에피쿠로스는 사모스에서 추방되어 오랫동안 이곳저곳을 떠도는 난민 생활을 겪다가 18세에 아테네에 와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때의 그리스 사회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에 벌어진 23년에 걸친 지리한 내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겪으면서 조화와 공존이라는 공동체의식이 붕괴되고 혼돈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였다. 귀족들은 전쟁과 권력 탐욕에 눈이 멀어 있었고, 시민들은 고통과 불안이 일상화된 삶 속에서 헤매일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었다.

에피쿠로스는 내내 절제 속에서 소박하게 살았고 아테네의 유명한 정원에 학교를 세워 산책하면서 고상한 대화를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말년에 오랜 투병 생활에 시달렸으나 고매한 학자로서의 풍모와 위엄을 잃지는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일부 귀족들과 시민들 중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왜냐하면 그는 권력싸움과 감각적 쾌락에 빠져있는 귀족들의 무분별한 삶을 크게 꾸짖었기 때문이다. 그의 학설이 쾌락주의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취하게 된 것은 아테네 일부 귀족들과 학자들의 비방과 모함에 더하여 에피쿠로스를 곡해한 로마인들의 탓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사상과 철학은 기원전 1세기의 로마인으로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루크레티우스(Lucretius, 기원전 96? - 54?)의 유일한 저작인 철학적 장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가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읽힘으로써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

아타락시아(ataraxia)를 삶의 목표로 삼은 에피쿠로스는 신에 의존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길 원한 무신론자였고, 데모크리토스와는 달리 세계가 원자만이 아니라 빈공간으로도 이루어졌으며, 원자도 불멸이 아니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물질이라고 보았던 유물론자였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가 에피쿠로스를  주제로 박사논문(제목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을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아리스티포스(Aristippos, 기원전 435-360)가 창설한 퀴레네 학파가 즉물적, 감각적 쾌락주의를 추구했다면, 에피쿠로스이 쾌락주의는 금욕적인 정신의 힘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려고 하는 생각이다. 에피쿠로스는 신을 대신할 만한 가치의 기준을 쾌락으로 생각하고, 그가 강조한 쾌락은 육체적 쾌락이 아닌 소극적인 의미의 쾌락, 즉 고통을 피하는데서 진정한 쾌락(정신적 쾌락주의)을 찾았다.

에피쿠로스는 설사 물질적인 것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소소하고 조그마한 일상의 즐거움 그런 것들을 아주 큰 즐거움으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 그것에 아주 만족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정신의 힘에서 나올 것으로 보았다.

 

에피쿠로스는 실상을 굳건히 인지하고 깨닫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깨달음이 늘 자신의 생각에 간직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수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실상을 알아도 그것이 자기마음에 중심적인 생각으로 들어오도록 , 그렇게 하여 두려움이 자기를 흔들어 대도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얻도록 다스릴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진정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상태가 곧 그가 말하는 부동심, 즉 아타락시아(ataraxia)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흔들림이 없음, 무혼란, 고통의 부재라는 상태가 곧 아타락시아이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방탕과 무절제가 아니라 고요하고도 평정한 삶으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두려움이나 무제한적이고 헛된 욕망 때문에 불행한 것인데, 인간이 만약 그러한 것들을 제어한다면 인간은 그 자신에게 이성의 축복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자는 자신의 욕구를 늘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통의 근원을 늘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욕구를 결핍으로 보았고, 자연스러운 욕구와 헛된 욕구를 구분하였다. 자연스러운 욕구(배고픔, 잠과 같은 생리적 욕구 등)를 충족시키는 것은 선하고 이상적인 쾌락이나 헛된 욕구(세계정복욕, 사치욕 등)는 충족시킬수록 더 불어나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으며 때로는 욕구의 충족이 오히려 고통을 낳으므로 피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에피쿠로스는 자연스러운 욕구 중 성욕은 불필요 한 것으로 보았는데, 성욕은 헛된 욕구 못지 않게 아타락시아를 방해하는 최대의 적으로 여겼다(남경태,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철학, 들녘, 2007, p.90).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는 제갈량이 자신의 아들에게 가르쳤던 가장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인 " 고요하지 않으면 먼 곳에 이를 수 없다

非寧靜無以致遠 " 것과 <노자> 16장 "완전히 비우고, 고요함을 돈독히 지켜라 致虛極, 守靜篤 " 를 말씀과 별반 다름이 없음을 본다.

 

3.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적 행복론

 

 나에게 있는 것은 살아 있는 것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만이 내가 의식하는 삶의 전부이니 걱정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즐겨라는 것이 에피쿠로스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진 에피쿠로스는 당장의 고통을 스스로 자기의 힘으로 이겨 내는 것, 지금 현존하는 이곳의 고통의 부재, 배척이 곧 자신이 실제로 추구해야 할 행복과 쾌락의 요체로 보았다.

 

개인의 안심입명과 자유를 추구한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은 철저하리 만치 자기수양과 수련을 통해서 감각적 쾌락이 아닌 정신적 쾌락의 성취를 통해 개인의 자유와 행복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물질적인 것 또는 감각적인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이나 정신적 가치의 추구를 통해 개인의 정신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에피쿠로스 행복론의 요체이다.

 

행복의 '수학적' 공식이 성취/욕망이라면, 에피쿠로스는 분자인 성취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분모인 욕망을 줄임으로써 행복의 양을 늘리는 방안을 채택했다.

 

4. 에피쿠로스의 죽음관

 

 에피쿠로스는 "진리의 기준은 감각이고 정열"이며, 감각의 정치성, 감각의 정밀함이 곧 이성이라고 주장한다. 죽음은 감각과 의식이 없는 상태일 뿐이고, 죽음이란 태어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본다. 태어나지 않은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죽음도 하등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체되는 것은 감각이 없고, 감각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죽음 또한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본다. 따라서 에피쿠로스는 지금 감각되고 경험되는 것 외에 내세에 초월적 세계가 있다든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고 환상이라고 강조하면서, 내세에서의 구원, 영생, 평안을 추구한다는 것은 모두 부질없다고 말한다.

 

그는 죽음의 실체를 원자들이 이합집산하듯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죽음의 실상을 알아서 오히려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죽음관을 보여준다.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죽음을 이해하면 죽음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수용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상이 왔을 때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 있으니까 걱정할 것도 없고, 죽은 다음에는 이미 내가 없으므로 죽음을 내가 의식할 수 없으니 그 또한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하는 노자적 시각에서 보면, 쾌락을 통해 행복의 나라로 가길 꿈꾼 철학자인 에피쿠로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고무적이고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출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4학년 교과목(이정호 엮음, 행복에 이르는 지혜, 방송대출판부, 2013)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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