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금재설화(錦載屑話)

이덕무의 서재, 팔분당 본문

산수호학/금재서재(寶南齋)

이덕무의 서재, 팔분당

산수호학(山叟好學) 2015. 4. 4. 00:33

 

 

 

 

   <논어>를 병풍 삼고, <한서>를 이불 삼아 생활한 책만 읽는 바보 형암(炯菴) 이덕무(李德懋, 1741~1793)에게 책은 인생의 전부였다.

책만 보았지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그를 '책만 보는 바보(간서치, 看書痴)' 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

 

   이덕무에게는 가난이라는 견디기 힘든 역경 속에서도 자신의 본성을 지키려는 노력과 의지를 담은 팔분당(八分堂)이란 의미있는 서재가 있었다.

 

   팔분당이란 서재의 이름을 지은 연유를 묻는 손님에게 형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가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집의 크기를 가지고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집이 큰 것을 좋아했으면 이름을 태산지실(泰山之室)이라 했을 것이고, 작은 것을 최고로 쳤다면 이름을 추호지실(秋毫之室)이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이상한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므로 군자가 취할 게 못됩니다.

 

대개 숫자가 차면 십이 되고 백이 되고 천, 만, 억이 되는데 모두 10이란 숫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에 하늘이 마음을 나누어주는데, 10분의 완전한 성선(性善)을 갖추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하여 어른이 되면 기질(氣質)에 구애되고 외부의 물질에 빠지게 되어 본연의 천성을 잃게 됩니다. 그러면 악의 세력이 급속히 확장하여 거의 8, 9분에까지 이르게 되니 10분까지는 그 거리가 얼마 남지 않게 됩니다. 아주 흉악하여 행동에 거리낌이 조금도 없는(중용의 용어로 무기탄, 無忌憚이라 함. 필자) 소인배들은 악함이 10분에 꽉찬 자들입니다. 그러나 저들 또한 당초에야 어찌 10분의 선함이 없었겠습니까? 다만 날이 갈수록 악한 짓을 더하였으므로 날마다 선함을 잃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보통사람은 선과 악을 5분씩 갖고 있는 자도 있고, 선과 악을 4 대 6의 비율로 갖고 있는 자도 있습니다. 선함이 7분이나 8분에서 10분에 이르는 것은 어떻게 나아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주희(朱喜, 1130~1200)는 '공자의 제자 안자(顔子 ; 안회를 높여 부름)는 성인(聖人)에 9분 9리 접근하였다' 하였고, 소옹(邵雍, 1011~1077 ; 소강절로도 불림)은 '사마광(司馬光)은 9분의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성인에 버금가는 분이나 훌륭한 군자도 오히려 1리나 1분이 차지 못하였으니 10분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10분에 도달하는 데 다만 1리 1분이 부족할 뿐이라면 보통사람과 비교한다는 것은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어쩌면 산과 악을 5분씩 갖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 소인배 되는 게 부끄러워 죽을 때까지 선행을 해서 다행히 6분이나 7분에 도달하기를 바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8분은 9분과의 거리가 1분일 뿐이니 무능한 제가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5분짜리인 제가 9분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치게 분수에 넘치는 일이니 이렇게 할 수 없고, 6분이나 7분에 주저앉는다는 것은 목표가 높지 못한 것이니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맹자는 '나는 어떤 사람이며 순(舜)은 어떤 사람인가?'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를 것이 없으므로 인의(仁義)를 실행에 옮기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무능한 저로서는 바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주돈이(周敦이, 1017~1073)는 '성인은 하늘을 바라고 현인은 성인을 바라고 선비는 현인을 바란다' 하였으니, 내 입장에서는 혹시 선비로서 현인을 바라는 그런 사람일 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아주 노력하여 따를 만한 것은 7분과 9분의 사이일 것이니 바로 8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어느 겨를에 이 좁고 답답한 집을 넓힐 수 있겠습니까? " (박철상, 서재에 살다, 문학동네, 2015, pp.81~83)

 

 

 

~~~~~~~~~~~~~~~~~~~~~~

 

 

  고 김수환 추기경(1922~2009)께서 자신의 노년의 자화상으로 '바보'라 칭하신 것은 자기 성찰과 겸손이 깊으셨기에 가능한 고백이었을 것이다.

형암(炯菴 ; 마음을 물처럼 잔잔하고 거울처럼 맑게 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음) 이덕무는 양반 적자 사대부의 나라에서 서얼(庶孼, 서자 + 얼자)이라는 신분의 한계와 가난한 환경이라는 벽 앞에도 굴하지 않고 책 속에서 참다운 본성을 찾아 나선 진정한 바보였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