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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재단상

입과 눈 그리고 귀

산수호학(山叟好學) 2009. 2. 4. 14:09
사람이 말을 할 때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랫 입술이나 아래턱이 움직이면서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윗 입술이나 윗턱은 움직이지 않는다.
반대로 보는 눈이 깜박일 때는 아랫눈썹은 움직이지 않고 윗눈썹이 움직인다. 눈은 사물을 본다는 원래의 기능 이외에 무엇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입과 눈을 한 가정에 비유해 보면, 자식은 입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것이고, 부모는 눈의 역할에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 쪽이 소리를 내면 다른 한 쪽은 그 살아있는 소리에 흥겨워하면서 사랑과 신뢰의 따뜻한 눈빛으로 감싸안아주고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눈의 역할을 해야 할 부모와 입의 역할을 해야 할 자식이 서로 반대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자식 상팔자` 라는 말도 있지만, 한 가정에 자식없이 부부만 덜렁 있으면 별 재미가 없을 것이고 그들이 자식들 처럼 매일 소리를 내면서 산다면 오래가질 못할 것이다. 반대로 자식은 말없이 듣고 부모는 눈의 역할을 포기한 채 소리로 일관한다면 그 또한 오래 가질 못할 것이다.

학교에서 강의실에서 선생님은 입의 역할을 다하는 데 열정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고, 보고 듣는 학생은 눈과 귀의 역할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정확하고 옳은 소리로 말하고 학생은 보고 들어야 한다는 기본적 틀위에 서로의 역할을 바꾸어서 수업이 진행될 때는 살아있고 역동적인 모습을 창출할 수 있겠지만, 그 기본적 틀을 아예 무시한 채 선생님은 듣고 학생이 소리를 낸다면 죽은 수업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소리가 양이라면 보는 눈은 음이다. 자식과 선생님이 양이라면 부모와 학생은 음이다. 양은 음을 통해서 보고 배우고, 음은 양을 통해서 보고 배울 수 있다. 

능엄경에 눈의 공덕은 800 이지만, 귀의 공덕은 1200 이라 했다. 눈과 귀의 공덕이 차이가 난다는 말인데, 왜 그럴까? 눈은 보는 데가 한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방금 보이는 사물도 숨어버리면 볼 수가 없는 것이 눈이다. 하지만 귀는 동서남북에서 나는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반야심경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의 `관세음(觀世音)` 은 세상의 흘러가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바로 보고 바로 들어서 공(空)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말이 아닌가.

요즘 젊은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도 옳은 소리든 싫은 소리든 다 들어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정수기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걸러서 필요한 물만 공급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이 하는 말에 귀담아 듣질 않고 근성으로만 대충대충 듣고 넘어갈려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남이 하는 말을 두눈으로 똑바로 보고 귀를 쫑긋세워서 바르게 듣고 난 후 필요한 말과 그렇지 않는 말을 나중에 정수기처럼 걸러도 늦지않을텐데 말이다.

남이 하는 말에 대해서 상대방의 눈빛을 쳐다보면서 정성스럽게 듣고자 하는 성실한 자세보다는 제 말만 막 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 요즘의 사회적 병태현상인것 같아 씁쓸하다. 

남이야 어찌되든 내만 배부르고 잘 되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가 이렇게 우리의 얼굴을 구성하고 있는 입과 눈 그리고 귀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두서 없이 글적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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