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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재설화(錦載屑話)
책과 나 본문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고 삶에 대한 진로를 선택하는 시기인 중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공부다운 공부, 운동다운 운동 어느 한 가지라도 제대로 옳게 한 것이 없었다. 더욱이 교과서 외의 책(시집, 소설책, 역사책을 비롯한 교양서적 등)과는 아예 인연없이 살았다. 한마디로 자극도 없었고 반응도 없었다.
운좋게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보다는 사람들과 먼저 친해지고 싶어서 가장 회원수가 많은 써클 중의 하나인 묵향회(墨香會)라는 서도써클에 가입했다. 그곳에는 순진하게 글씨를 배우겠다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나처럼 노는 사람, 서로 뭔가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통기타치며 함께 노래부르는 사람들로 열기가 가득했다.
요즘 표현으로 `새내기` 생활 한달이 흐른 어느날, 오랫만에 글씨(구양순체)라도 배워볼 마음으로 써클에 갔었는데, 마침 한 테이블에서는 같은 동년배들이 신나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이해하고 웃는 소리(말)를 난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듣는 말뿐이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커겠는가. `속으로 내가 도대체 대학생 맞나!` 라는 생각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왠 깨달음(?)이란 말인가. 과장되게 표현하면 마치 스승한테 화두를 받아서 오랜기간의 고행끝에 드디어 도(道)를 깨우친 스님처럼, 순간, `아!! 어른들은 이래서 사람은 손과 눈이 부지런해야 하고 책을 늘 가까이해야 한다` 고 말씀하신 것이었구나. 하는 자각 내지 각성이라는 실로 엄청난 행운의 일대 커다란 깨우침(?)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늘에서 보고 계신 조상님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 사건 이후로 수업이 있는 교수님, 써클 선배들에게 오늘의 자신으로 인도해준 책 혹은 감명깊게 읽는 책들을 소개받아 무조건 사서 읽기 시작했다. 소개받은 책들은 성경, 논어부터 시작해서 안병욱, 김형석, 김동길, 이어령, 김태길 교수등의 에세이류, 윌듀란트의 철학이야기,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 사랑의 기술,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칼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괴테의 파우스트,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 등 실로 이루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소개받은 것도 모자라서 한달에 한번꼴로 서울 교보문고에 들락날락 거렸다. 지금 내 연구실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그 때 산 책이다.
사람은 무엇을 할 때 혹은 어느 때 가장 행복하고 즐거울까?
어떤 사람은 목욕하고 난 후, 또 어떤 사람은 백화점에 가서 쇼핑할 때, 또는 취직, 승진, 시험에 합격할 때, 결혼할 때, 아이를 가졌을 때, 여행할 때, 기타 등등...
나는 서점에 가서 책을 보고, 사고 싶은 책을 살 때가 최고 재미있고 즐겁다. 나중에는 나의 인격도 양서에서 우러나오는 향(香)처럼 고운 향기가 났으면 좋겠다. 나중에 나이들면, 카페맛이 나는 서점을 갖고 싶은 것이 나의 작은 꿈 중의 하나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나이테라 할 수 있는 책을 과연 몇권 정도 읽을 수 있을까? 세계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은 인도의 명상가였던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1931.12.11-1990.1.19)였다고 한다. 라즈니쉬는 10년 동안 약 20만권 정도의 광범위한 독서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책을 읽고 나서 대학에서 교수의 강의를 들으니까 교수 자신의 말은 하나도 없고 전부 남의 말만 해서 실망했다는 일화도 있다.
인도의 기행문인 <왕오천국전>을 후세에 남긴 신라의 고승 혜초(慧超,704-787)는 "만권의 책을 독파하고 만리의 파도를 헤친다" (讀萬券書 破萬理波) 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130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에 굳건히 서있는 우리 후세들은 혜초의 구도(求道)에 대한 정열과 엄청난 투지 및 결연한 의지를 생생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테넷이라는 거대한 바다와 당당히 맞서서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닥치는대로 읽어서 새로운 지식정보을 습득해 나가야 할 것이며, 따뜻한 영혼의 집인 책을 통해서 내 자신이 바로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가 될 수 있게 착실히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정신에서 만들어낸 것 중에서 최대의 것은 책이며(앙드레 지이드), 책은 오직 영감을 주기 위한 것이고(에머슨),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책이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의 혼이 거기에 대답하는 끊임없는 대화다(앙드레 모로와).
나재철닷컴-
http://www.najaech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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